성 프란시스 수도회

3: 동정심, 창조

 

 

 

성 프란시스

 

3. 동정심, 창조

 

 

들어가며

 

많은 사람들이 프란시스를 생각할 때 즉시 그를 이번 세미나 제목인 세가지 가치들과 연결하여 생각한다. “동정심(compassion)”- 참으로 친절하고 온유한 어떤 사람으로 프란시스에 대해 생각한다. “창조(creation)”- 새와 양들과 함께하는 프란시스에 대해 생각한다. “평화(peace)"- 그가 있는 곳에서는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이 언제나 평화롭게 되는 사람으로 프란시스에 대해 생각한다. 이런 생각들에는 부분적인 진실이 있지만 실재 상황은 더욱 깊고 풍요롭다.

 

이 세가지 주제들을 함께 모으는 것이 약간 어색하게 보여질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들 모두는 프란시스와 세상의 관계 -생물과 무생물- 그리고 삼라만상에서 하느님 현존을 바라봄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다. 단지 하느님 현존의 표지로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구원의 표지로서.

 

우리는 이들 주제들을 차례로 고찰해 볼 것이다. 각 주제들을 고찰한 후에는 소모임 토론을 위한 작은 시간을 가질 것이다.

 

프란시스와 동정심

 

동정심”이란 말은 타인들의 느낌들 가운데 어떤 것을 자신 안에서 느끼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을 향해 “미안함을 느끼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사람의 슬픔과 비탄에 들어가서 함께 나눔을 의미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프란시스와 그의 동료들의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프란시스는 자신보다 더 망토가 필요하다 생각됐던 다른 사람들에게 항상 자신의 망토를 넘겨 주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느 때에 프란시스가 시에나에서 오다가 가난한 사람 하나를 만났다. 그리고 자기 동료에게 말하였다 : “형제여, 우리는 이 망또를 그 주인인 저 가난한 사람에게 돌려 주어야 합니다. 이 망또는 우리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까지만 우리가 빌린 것입니다.” 사부님께 그것이 아쉽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의 동료는 당신을 돌보지도 않고 자구 남만 생각하는 그를 그렇게 못하게 하려고 이에 반대하여 완강하게 거절하였다. 성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 “나는 도독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보다 훨씬 더 필요한 사람에게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독이나 진배없습니다.” 그 형제가 항복하였고, 프란시스는 자기 망또를 그 가난한 사람에게 건네 주었다. (첼라노의 토마스, 제2생애 87번)

 

실제로 프란시스는 가난한 사람이 진짜 소유자이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도 그들로부터 빌린 것으로 여겼다. 프란시스가 동정심으로부터 물건들을 타인들에게 주는 그 태도에 동료들은 자주 화를 내야만 했었다!

 

첼라노의 토마스는 프란시스의 동정심에 대한 신학적 토대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과연 어떤 혀가 가난한 이들을 향한 이 사람의 갸륵한 동정심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에게는 아마 자비가 있었고, 위에서 받은 또 하나의 자비가 있어서 자비가 두 배나 되었다. 프란시스의 영혼은 가난한 이들에게 측은한 생각을 품었고, 그가 도움의 손길을 뻗을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애정을 보여 주었다. 그가 궁핍한 사람에게서 무엇을 보든지, 또는 그것이 어떠한 빈곤이든 간에 프란시스는 그 궁핍을 즉시 마음으로 그리스도와 연결시켰다. 그래서 그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가난한 부인의 아들을 보았고, 그녀의 손에 알몸으로 안고 있었던 그 아들을 그도 마음 안에 알몸으로 안았다. 그리고 비록 그가 모든 시기심을 옆으로 지워 버렸지만 가난에서 만은 그럴 수가 없었다. 어쩌다 자기보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는 금방 시샘을 하였고, 완전한 가난에 안달을 부리며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였다. (첼라노의 토마스, 제2생애 83번)

 

프란시스는 모든 가난한 사람들에서 우리들 가난 부인 - 복되신 동정녀 마리아 -의 아드님이신 벌거벗은 예수를 보았으며 영혼은 그 가난한 사람을 향해 녹아버렸다.

 

프란시스는 자기 동료들을 향해 특별한 동정심을 가졌다. 첼라노의 토마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말한다.

 

어느날 밤, 다른 양들은 다 조용한데 양 한 마리가 소리쳤다 : “죽겠습니다. 형제들이여! 아아 베고파 죽겠습니다!” 즉시 탁월한 목자가 일어나 빨리 손을 써 병든 양에게 적절한 치료를 서둘렀다. 그래 봐야 시골 음식이었지만 식탁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사실 포도주가 떨어지면 물로 대신하는 경우도 흔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그가 먼저 수저를 들었고, 그리고 난 다음에 그 형제가 부끄러워하지 않게 하려고 다른 형제들도 사랑을 실천하도록 불러 모았다.....

 

그리고 덧붙여 말하였다. “친애하는 형제들, 내가 함께 먹은 것은 나의 의무 때문에 한 것이지 내가 먹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십시오. 형제애가 그리 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이 사랑이 여러 형제들에게 하나의 표상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러나 음식이 표양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후자는 대식에 이바지하지만, 전자는 영혼에 이바지하기 때문입니다. (첼라노의 토마스, 제2생애 22번)

 

그의 동정심은 진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창조적 이해에 좌우되었다. 규칙이기 때문에 규칙을 따르는 것이 더 중요한가 또는 중요한 원칙들을 찾는 것이 더 좋은가? 이 경우에 프란시스는 규칙의 확고한 따름보다는 사랑을 보여주는 기회로 자기 형제의 배고픔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프란시스의 동정심은 단지 가난한 사람과 자기 동료들을 향해 있지 않고 모든 피조물들을 향해 있었다. 예를 들면 예수가 하느님의 어린양이었기 때문에 어린양을 향해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한번은 팔려지기 위해 시장에 끌려가는 두 마리의 어린양을 위한 값으로 그의 망또를 주었다(첼라노의 토마스, 제1생애 79번에서). 또 한번은 염소의 무리들과 썩여 있는 어린양 한 마리를 샀으며 어린양은 나쁜 염소무리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런 다음 그는 어린양을 수녀원에 주었으며 수녀들은 해마다 그 양털로 투니카를 짜서 프란시스에게 보냈다. 그는 이것을 대단히 공손하게 그리고 마음에 희열을 느끼며 받았고 포웅하고 입을 맞추었으며 당신의 행복을 나누려고 주위에 있는 모든 형제들을 초대하였다(첼라노의 토마스, 제1생애 77-78번에서)

 

프란시스는 왜 이렇게 사랑했는가? 단지 낭만적 감정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이것은 하느님의 “발자취”는 모든 피조물 속에 있으며 이 발자취들을 따름으로 자신(그리고 우리가)이 주님께로 올라갈 수 있음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나온다. 첼라노의 토마스는 프란시스가 보았던 이들 발자취들 가운데 몇 개의 사례를 이야기한다.

 

그는 빛과 등(燈)과 초를 스스로 스러지게 놓아 두었다. 그들의 밝음을 그의 손으로 소멸시키기를 싫어하였으니, 그는 그것들을 영원한 빛이신 그분의 상징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가 돌 위에 “바위 위에 이몸을 올려 주소서” 하고 시편을 욀 때, 그는 더 큰 존경심으로 “바위의 발치에까지 이몸을 올려 주소서” 하고 말하곤 하였다.

 

그는 형제들이 땔나무를 벨 때, 나무를 통째로 자르지 말라고 하였다. 다시 싹이 틀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밭일을 하는 형제에게 밭 둘레를 가꾸지 말고 그냥 두라고 일렀다. 때가 되면 초록빛 풀잎과 예쁜 꽃들이 만물의 아버지이신 그분의 아름다움을 전하도록 하기 위해서 였다. 그는 향기 좋은 화초를 심기 위해서 밭에 작은 터를 남겨 두라고 일렀으니, 그 향기 좋은 화초들을 보는 이들로 하여금 영원한 감미로움이신 그분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발에 밟힐까 염려스러워 그는 길에 있는 작은 벌레를 옮겨 놓아 주었다.

 

꿀벌들이 겨울추위에 얼어죽지 않도록 꿀과 가장 좋은 포도주를 내주라고 명하였다.

 

그는 모든 동물들을 형제라는 이름으로 불렀고, 갖가지 동물 중에서도 온순한 것을 더 좋아하였다. (첼라노의 토마스, 제1생애 165번에서)

 

이것은 프란시스의 동정심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삼라만상은 자신이 맺고 있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보여진다. 만약 어떤 것이 우리를 하느님께 향하도록 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동정심없이 이것을 바라볼 수 있겠는가?

 

토론과 질문

 

  • 동정심”은 당신에게 무슨 의미인가? 프란시스의 영혼이 가난한 사람을 향해 “녹았다”는 기술에 당신은 어떻게 반응하는가?
  • 프란시스가 보았다는 “하느님의 발자취”에 관해 당신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당신은 자신의 경험에서 다른 것들을 더할 수 있는가?

 

프란시스와 창조

 

프란시스는 자연세계 안의 하느님의 현존에 대해 변치 않는 깨달음을 살았다. 그가 보는 것이 무엇이든 하느님은 삼라만상 안에 계시다는 표지이었다. 첼라노의 토마스가 말하는 것처럼.

 

영화로우신 사부 프란시스가 육신으로 있을 동안에 실천하고 가르친 일을 일일이 예를 들어 말한다든가 한곳에 모은다는 것은 시간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이다. 과연 누가 하느님의 소유인 모든 피조물에게 품었던 그의 위대한 사랑을 표현해보일 수가 있겠는가? 삼라만상에서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지혜와 힘과 선을 명상할 때에 그가 즐긴 그 감미로운 느낌을 누가 말로 할 수 있으리오? 진정 그는 창조주의 지혜와 힘과 선을 관조하면서 해를 쳐다볼 때, 달을 바라볼 때, 그리고 별과 창공을 응시할 때,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경이로운 기쁨에 자주자주 도취되곤 하였다. 오, 단순한 경건이며! 경건한 단순이며! (첼라노의 토마스, 제1생애 80번에서)

 

프란시스가 삼라만상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바라볼 수 있는 그 때에 하느님을 만물의 창조주로 알게 됨으로써 그것들을 자신의 형제와 자매라고 부를 수 있었다. 이 관계는 “아무도 알 수 없는 탁월한 방법과 예민한 감성으로 사물의 숨겨진 비밀을 간파” (첼라노의 토마스, 제1생애 81번에서)할 수 있도록 위대한 친교 중 하나로 발전하였다.

 

그의 비전(vision)은 위대한 영성적 저작 가운데 하나인 `태양의 노래'에서 넘쳐났다. 그 속에서 그는 삼라만상 안과 삼라만상을 통해서 그리고 삼라만상을 향하여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다음에 인용되는 한 구절은 프란시스의 저작과 사상의 향기 가운데 어떤 것을 줄 것이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시나이다.
그로 해 낮이 되고 그로써 당신이 우리를 비추시는,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반짝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시나이다. 지존이시여!
(태양의 노래 3-4절)

 

동물들은 그의 사랑을 느꼈으며 그에게 순종하였다. 새들이나 다른 동물들에게 설교하는 그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그가 새들에게 처음 설교를 한 후 첼라노의 토마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그는 전에 새들에게 설교하지 않은 자기의 무관심에 스스로를 나무라기 시작하였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날부터 그는 모든 새들과 동물 그리고 파충류에게까지, 비록 감각이 없는 피조물에게까지도 그들의 창조주를 찬미하고 사랑할 것을 열의를 다하여 권하였다. 이것은 그가 구세주의 이름을 부르며 권하면 그들이 이에 순종하는 것을 개인적인 체험으로 매일매일 느꼈기 때문이었다” (첼라노의 토마스, 제1생애 58번에서) 그래서 프란시스에게 하느님에 관해 말하는 아름다운 피조물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들에게 주의를 돌리시는 하느님처럼 살 수 있도록 그들에게 말해야 하는 의무가 있음을 깨달았다.

 

프란시스에 대한 동물들의 순종은 프란시스와 동물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하나의 상징 이상이다. 이것은 하느님에 대한 순종과 자신의 거룩함에 대한 더욱 깊은 실재를 가리킨다. 확실히 다른 성인들도 똑같은 일들을 체험하였다. 예를 들면 성 베다는 성 컷스버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만약 어떤 사람이 모든 피조물들의 창조자를 충성스럽고 온전한 마음으로 섬긴다면, 모든 피조물이 그의 명령들과 갈망들을 섬겨야 한다는 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피조물에서 하느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프란시스에 대해 앞 부분(section)에서 이미 들었다. 첼라노의 토마스는 또 다른 이미지를 우리에게 준다.

 

프란시스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이 세상을 선하신 하느님의 가장 깨끗한 거울(표상)로 보았다. 그는 창작가이신 그분을 찬미하였다. 피조물에게서 무엇을 발견하든 그것을 창조주와 관련시켰다. 그는 주님의 손에서 빚어진 모든 작품 안에서 즐거워하였고 유쾌한 사물들의 배후의 뜻을 살핌으로써 그 사물들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이성과 원인을 보았다. 그는 아름다운 사물들 안에서 아름다움 자체를 보았다. 모든 사물들이 그에게는 선이었다. 그들은 “우리를 만드신 분은 가장 좋으신 분입니다”라고 그에게 외쳤다. (첼라노의 토마스, 제2생애 165번에서)

 

토론과 질문

 

  • 자연에 대한 프란시스의 관점은 자연 “자원”에 대한 우리들의 사용과 어떤 연관을 갖고 있는가?
  • 프란시스가 이 세상을 “선하신 하느님의 깨끗한 거울(표상)” 로 사용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라고 생각하는가? 당신도 똑같이 할 수 있는가?

 

프란시스와 평화

 

성 프란시스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전쟁과 폭력을 쉽게 잊게 할 수 있는 너무나 큰 평화의 한 상징이다. 그러나 아씨시는 이웃 페루지아와 자주 전쟁을 하였다. 프란시스 자신이 젊었을 때에 다른 아씨시인들과 함께 페루지아에 대항하여 싸우기 위해 전투에 참가하였으며 실제로 전쟁이 끝난 후 약 1년 동안 포로로 잡혀있었다. 육중한 방어용 성문을 갖고 있는 강고한 벽이 아씨시를 보호하였으며 도시 위의 탑은 강력한 요새였다. 폭력과 전쟁은 정상적이었다.

 

프란시스에게 있어 언제나 출발점은 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이었다. 유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 “`주님이 당신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 하고 우리가 해야 할 인사를 주님이 나에게 제시해 주셨습니다”(유언 23절). 첼라노의 토마스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

 

그는 설교할 때마다 하느님의 말씀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기 전에 항상 먼저 평화를 기원하였다 : “주께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는 만나는 모든 남녀 행인들에게도 언제나 열심히 평화를 전하였다. 이러한 까닭으로 해서 평화를 싫어하는 또한 구원도 싫어했던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의 협력으로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평화를 간직하게 되어 평화의 자녀가 되었고 구원을 갈구하는 이가 되었다. (첼라노의 토마스, 제2생애 23번에서)

 

평화”와 “구원”의 연결을 주목하기 바랍니다. 유일하고 참된 평화가 하느님과의 평화에 있게 된 이후 둘은 프란시스에게 분리될 수 없었다. 평화는 하느님과 함께 하는 것 이상이 아니다.

 

평화를 가져오기 위한 프란시스의 시도들 가운데서 기록된 몇 개의 작은 사건들이 있다. 하나는 아씨시의 시장과 주교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격렬한 논쟁으로 서로 갈라져 있었다. 프란시스는 이미 태양의 노래를 썼으나 그것에 한 절을 덧붙였다. 그리고 두 형제들에게 이것을 주교와 시장을 위해 부르도록 했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 받으시나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태양의 노래, 10~11절)

 

프란시스가 쓴 말들을 들으며 시장은 모든 사람들에게 말했다.

 

나는 여러분에게 진실로 말합니다. 나는 나의 주인으로 모셔야 하는 주교님을 용서할 뿐만 아니라 나의 형제와 아들을 죽인 자조차 용서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주교에게 “보십시오, 이것이 당신을 즐겁게 하기에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종 복되신 프란시스의 사랑을 위해 당신에게 개심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그의 발아래 자신을 내던졌다.

 

주교는 손으로 그를 잡고서 일어나 말했다 : “나의 주교직으로 인해 겸손이 내게 요구되었지만 나는 화를 쉽게 내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 그래서 크나큰 친절과 사랑으로 그들은 서로를 껴안고 입맞추었다. (페루지아 전기 84번에서)

 

이 작은 사건은 평화를 만들기 위한 하나의 모델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평화 만들기는 하느님과 시작한다. 평화를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은 회개로 출발하고 그런 다음 용서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평화를 만드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자신들이 가진 어떤 것, 오만과 편견들을 놓아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렵고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프란시스의 말씀을 다시 한번 주의 깊게 들으며 끝낸다.

 

평화의 사람은 복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이다” (마태 5,9). 진정 평화의 사람은 이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고통스러운 일들 가운데서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때문에 몸과 마음에 평화를 간직하는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권고 15번)

 

토론과 질문

 

  • 오늘날 평화가 가장 필요한 곳은 어디인가?
  • 당신은 평화를 만드는데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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